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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HAS Life

‘맛의 살롱’에서 보낸 6일

슬로푸드를 아시나요?
우리나라에서 슬로푸드라고 하면 대부분 ‘유기농’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슬로푸드를 ‘유기농’ 이라고만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식생활 캠페인으로
지역 특성에 맞는 전통적이고 다양한 식생활 문화를 추구하는 국제운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유기농 이상의 지역 특색에 맞는 먹거리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 담는 큰 그릇>에 세계슬로푸드대회를 취재한 내용이 있어서
풀사이 가족분들께 소개해 드립니다. ^^


2008 살로네 델 구스토 & 테라 마드레 취재 일기
‘맛의 살롱’에서 보낸 6일

‘슬로푸드’가 정말 ‘유기농’이라는 뜻만 가졌다면, 한국은 이미 슬로푸드 전성기다. 하지만, 슬로푸드 운동이 왜 생겼고, 외국에선 어떤 대접을 받는지 그 실체를 엿보고 싶었다. 고환율 시대에 굳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탈리아 토리노로 향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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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슬로푸드협회


10월 22일, 아르마니 속옷과 햄 한 조각


“아르마니 속옷을 입었다고 그게 내 몸의 일부가 되지는 않지만, 햄 한 조각을 먹어도 그건 내 몸의 일부가 된다. 내가 패션보다 음식을 더 걱정하는 이유다.”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독일산 바르슈타이너 맥주를 홀짝이며,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 카를로 페트리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환율 탓에 잡혀 있던 출장도 취소되던 지난 10월 초 내가 편집국장에게 “이번에 우리가 슬로푸드를 취재하지 않으면, 내후년에 〈조선일보>나〈중앙일보〉가 치고 나올 것”이라고 협박한 이유가 꼭 페트리니가 했던 그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한국에서 ‘슬로푸드’라는 말은 ‘유기농’ 정도의 뜻으로 사용된다. 슬로푸드가 진짜 그런 의미에 불과하다면, 이미 한국은 슬로푸드 운동의 전성기다. 아이가 있는 주부 가운데 ‘초록마을’이나 ‘올가’라는 이름 한번 안 들어본 사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슬로푸드 운동이 왜 생겼고, 외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그 실체를 엿보고 싶었다.


                   


10월 23일, 작은 와인 양조자의 고백


2008 ‘살로네 델 구스토’와 ‘테라 마드레’행사가 열리는 링고토 전시회장 주변은 아침 9시부터 사람으로 붐볐다. 살로네 델 구스토는 음식 주제별로 전문가·요리사와 참가자가 함께 맛을 보고 토론하는 행사다. 참가자가 맛을 보고 토론하는 테이스트 워크숍, 요리사가 직접 요리 시연을 하는 씨어터 오브 테이스트, 와인·음식 장인과 대화하는 자리인 미팅 위드 더 메이커스 등의 부대행사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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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슬로푸드 대회 현장. 대회 로고가 보인다.

살로네는 ‘살롱’, 구스토는 ‘테이스트’이므로, 번역하면 ‘맛의 살롱’쯤 된다. 상대적으로 미식에 초점을 맞춘 행사다. 테라 마드레에서 테라는 랜드, 마드레는 마더다. ‘어머니 대지’라는 뜻이 함축하듯 전 세계 154개국에서 온 1,600여 음식공동체(고유의 조리 전통을 가진 지역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여 음식의 맛을 보고 전통 음식의 소멸을 막을 대안을 공동으로 마련한다. 미식보다 저항성에 초점을 맞춘 행사인 셈.

오후 3시10분. 노트북에 캐논 5D 카메라, 24-70밀리미터 렌즈, 70-200밀리미터 렌즈까지 매고 헉헉거리며 강의실 문을 열었다. 3시 예정인 미팅 더 메이커스 행사가 이미 시작됐다. 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는 지글리오 섬의 작은 와인 양조업자가 자신의 20년 넘은 와인 양조 인생과 철학에 대해 애호가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다.
이 행사의 취지 가운데 하나는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와 맛과 와인을 소재로 대화한다는 것. 이탈리아는 물론 러시아, 독일에서 온 젊은이들이 프란체스코 카르파냐(Francesco Carfagna)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한국에서 와인은 ‘요새 유행하는 수입된 술’이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음식과 같은 존재다. 현재 한국에서 유기농이나 무공해 식품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것처럼, 유기농 와인이 이들에게 화두였다. 프란체스코 카르파냐의 전언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은 고향인 조그만 섬에는 수많은 포도 품종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각각의 포도 품종은 개성적인 풍미를 낸다는 것과 자신은 결코 이산화황 등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산화황은 와인을 숙성시킬 때 산화방지제로 첨가한다.


10월 24일, 유기농? 생태 친화도 있어!


살로네 델 구스토에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다룬 부대 행사가 많아 눈길을 끌었다. 유기농 와인을 주제로 한 테이스트 워크숍 행사만 3개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 평가서 <비니 디탈리아>에서도 ‘와인 종주국’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비니 디탈리아>는 이탈리아 제1의 레스토랑 평가서이자 평가 단체인 <감베로 로소>가 슬로푸드협회와 함께 펴낸다. 따라서 와인 평가에는 슬로푸드의 철학이 반영돼 있다. 단적으로 이탈리아의 여느 레스토랑 가이드와 다른 와인 평가 항목을 들 수 있다. 와이너리 주소와 연락처 밑으로 차례로 일 년 생산량(병), 포도밭 경작 면적, 포도 재배 스타일 항목이 표시된다. 포도 재배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콘벤치오날레), 자연 방식(나투랄레), 공인 유기농 방식(비올로지코 체르티피카토)으로 구별된다.

전통적인 방식은 포도 재배에 살충제 등 농약을 쓰고 양조 과정에서 이산화황 등 첨가물을 넣는다. 자연 방식과 공인 유기농 방식은 포도 재배부터 양조 과정까지 인공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는 점에서 동일하다. 공인 유기농 방식은 유럽연합(EU)의 유기농 재배 기준을 따랐다는 인증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반면, 자연 방식은 유기농 기준조차 인공적이라 여겨 생태 친화적인 재배·양조를 추구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느낌의‘신비주의적인(?)’ 생산 방식을 의미한다.


10월 26일, 24시간 편의점은 어디에?

살로네 델 구스토의 부대행사에 주관자로 참여한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 유일했다. 청주와 초밥을 소재로 2개의 테이스트 워크숍 행사와 1개의 씨어터 오브 테이스트 행사를 주관했다. 한국 음식이 저 무대에 설 날이 곧 올까?

취재하고 사진 찍고, 사진 찍고 취재하기를 반복하니 호텔로 돌아온 시간이 나흘째 밤 10시다. 목이 너무 말라 스파클링 워터 한 병을 사려고 밖에 나왔지만, 예고 없이 40분을 헤매야 했다. 24시간 편의점은커녕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고요했다. ‘겨우’ 10시에 말이다. 40분을 헤맨 뒤에 겨우 상점이 아닌 바(Bar)에 들어가 사정 끝에 물 한 병을 살 수 있었다. 해가 지면 집에서 쉬는 ‘슬로’한 삶의 속도가 없었다면 슬로푸드 운동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


10월 27일, 병원·학교 급식을 바꿔라!


카를로 페트리니는 훌쩍 큰 키에 눈빛이 쏘는 ‘포스’가 ‘장난 아닌’ 할아버지였다. 한국에서 그의 책을 읽으며 항상 다음과 같은 의문이 맴돌았다. 그는 “덜 먹는 대신 좋은 것을 먹어라”라고 하지만, 덜 먹더라도 더 좋은 것을 사기 어려운 계층도 존재하지 않는가? 한국어로 번역된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김종덕 옮김·이후 펴냄)에서 그는 이 질문에 대해 “현대 산업사회는 잘못됐다. 우리는 먹을 것에 좀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고 원론적인 답변만 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좀 더 진전된 답을 줬다. 그의 전언은 다음과 같았다. “유기농 먹을거리와 모든 고급 먹을거리는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지나치게 높지 않은 가격에 생산하는 것이 그 도전이다. 만약 유기농 먹을거리가 돈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도전도 아니다. 이 도전을 달성하기 위한 해결책의 하나는 학교나 병원 같은 공공 서비스이다. 병원이나 학교에서 유기농 먹을거리를 급식하면 가격을 낮출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유기농법으로 먹을거리를 재배·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로푸드 운동의 슬로건은 ‘굿(good), 클린(clean), 페어(fair)’다. ‘좋음’은 감각적으로 맛이 좋아야 함을 가리킨다. ‘깨끗함’은 먹을거리 생산과정에서 환경을 해치지 않아야함을 뜻한다. ‘공정함’은 생산·유통 과정에서 사회정의를 해치지 않아야 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유기농을 사 먹으란 얘기 아니냐?”거나 “내 아이, 남편이 먹을 유기농만 걱정하기에도 바쁘다.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 없다”는 반론이 들어올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병원과 학교에서의 급식이 중요하다”는 페트리니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리 집에서 유기농을 먹어도 학교에서, 회사 구내식당이나 근처 밥집에서, 병원에서, 교도소에서 한 끼라도 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슬로푸드가 ‘유기농 식탁’이 아니라 ‘식탁 위의 민주주의’인 이유다.


10월 28일, 미식가와 생태주의자


돌아오는 비행기 이코노미석에서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은 “사람이 여행을 다니는 게 아니다, 여행이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People don't take trips, trips take people).”라고 썼다. 적어도 이번 취재에 대해서 스타인벡의 말은 옳다. 슬로푸드 대회는 생각보다 성대했고, 페트리니는 예상보다 털털했다. 카를로 페트리니는 이렇게 말한다. “생태적 감수성이 없는 미식가는 바보지만, 미식가적 감수성이 없는 생태주의자는 불쌍한 사람이다.” 나 역시 이 말에 서명한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삶은, 식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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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슬로푸드협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고나무는  <한겨레> 생활문화섹션 <Esc>에서 가장 ‘개그 센스’ 있는 남자 기자(남자 기자 3명)로, 바람 부는 고향 제주 음식에 관한 책을 쓰는 꿈을 가지고 있다. <Esc>에서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그가 싫어하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관심 있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본 기사는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

2008년 겨울호에 게재되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