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흰 쌀밥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잡곡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흰 쌀만을 찾던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어느 마트건 쌀 코너 한켠에는 잡곡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있고
정제쌀이라도 3도, 5도 등 정제 횟수별로 구분해 팔고 있으니 말이에요. ^^
그런데 혹시
잡곡 생산 분야에도 '마이스터(명장, 장인)'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친환경 식품점 올가에서는 유기농업을 올바르게 이끌어가고 있는
생산자 10명을 뽑아 올가 마이스터로 선정했는데요.
잡곡분야에서는 유일하게
충북 제천시 송학면의 임영규 씨가 뽑혔답니다.
'마이스터'라는 호칭을 듣는 그분의 농장...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겠죠?
보석보다 빛나는 잡곡이 가득한 그곳으로 여러분들을 모십니다.
유기농 수수, 차조, 검정깨, 그리고 귀족 기장!
보석보다 빛나는 올가 잡곡 투어
그깟(!) 잡곡 따위, 수수, 차조, 참깨, 율무, 기장들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이날 처음 알았다. 제 마음껏 잘 자라 눈부시게 빛나는 잡곡밭 투어를 떠났다.그리고, 붉은 수수밭 한가운데 섰을 때 비로소 눈치챘다. 오호, 이 땅 이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에코 투어’구나…!
1 유기농 찰보리밭.
생일이 되면 엄마는 수수팥밥에 수수팥떡을 해주셨다. 생일보다 수수팥밥이 더 좋았다. 정월대보름날은 훨씬 더 생일 같았다. 전날 밤 부엌에 놓여있는 잡곡 바가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구나.
국보급 잡곡 마이스터
얼마 전 친환경 식품점 올가는 한국의 유기농업을 모범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생산자 10명을 가려 뽑아 올가 마이스터(친환경 명장 갋 채소 4명, 과일 5명, 잡곡 1명)로 선정했다. 유기농법에 있어 최고의 전문가이자 바른 농사 바른 먹거리를 이끌어가는데 남다른 사명감을 지닌 장인이고 명인이랄 수 있다. 특히 잡곡 부문 마이스터의 경우 현재 쌀을 제외한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이 고작 5 퍼센트도 안 되는 ‘긴박한’ 상황을 감안할 때 그 가치는 가히 국보급이지 싶다.
지독히 덥던 8월 중순, 충북 제천시 송학면에 사는 잡곡 마이스터 임영규 씨를 만났다. 찰보리, 보리, 찰수수, 서리태, 적두(팥), 백태, 흑미, 기장, 율무, 약콩, 차조, 검정깨 등 11가지 잡곡을 재배하는 ‘임 마에’는 자기 자랑보다 ‘땅 자랑’을 먼저 했다. “분지형인 제천은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이가 크고 일교차도 커서 노지에서 재배하는 잡곡을 짓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땅에 석회질이 많아 색이며 맛이 좋고 육질도 단단해 저장성도 높고요.”
밑줄 쫙! 족집게 잡곡 공부
이 댁 유기농 잡곡의 재배 과정은 대략 이렇다. 4~5월, 늦어도 6월 초에는 파종해 추석 전에 수확을 마친다. 우선 밭에 퇴비를 넣어 땅을 기름지게 한 다음 씨를 뿌린다. 깻묵, 보리겨, 수수겨, 유기농콩 등 밭에서 수확하고 남은 잡곡 부산물로 직접 만든 발효 퇴비를 넣어야 땅이 “오지다(야무지고 알차다).”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 이들의 가장 큰 숙제인 잡초와의 전쟁은 땅에 심은 잡곡 낟알에서 싹이 트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한눈 팔았다가는 순식간에 어른 배꼽 높이까지 자라 잡곡밭 아닌 잡초밭이 되기 십상이다. 기본이 두세 번이고 작물에 따라 많게는 네 번 이상의 제초 작업이 이루어진다. 잘 여물면 이삭 중 특히 좋은 것은 따로 골라 끊어내어 탈곡해 이듬해에 심을 씨앗으로 챙겨둔다.
파종, 제초, 수확, 그리고 보리 심기
수확이 끝나면 그 자리에 다시 퇴비를 뿌리고 뽑아낸 잡초, 탈곡하고 남은 잎과 줄기, 낟알 껍질 등을 웃거름으로 준다. “밭에서 난 것 중 버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바로 보리나 우리밀을 심는다. 같은 땅에 연이어 같은 작물을 심으면 땅이 거칠어져서 돌려 심기를 하는 것이다. 보리는 여러모로 기특한 작물이다. 보리를 심은 땅은 푸실푸실하여 공기가 잘 통하고 염분도 없어져 세상 어느 화학비료나 퇴비보다 효과가 탁월하다. 값비싼 잡곡을 마음껏 골라 먹을 수 있는 임씨가 가장 좋아하는 것도 보리다. “난 보리밥이 제일 맛있어요. 세끼를 다 먹습니다.(웃음)”
검정 비닐 대신 숨쉬는 흙 이불
생전 처음 본 살아있는 수수만큼 인상적인 장면은 검정 비닐을 덮지 않은 흙이다. 요즘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농촌은 온통 비닐 천지다. 비닐 하우스에 이어 하우스 안이든 밖이든 밭에는 어김없이 검정 비닐이 덮여있다. 잡초를 조금이라도 덜 자라게 하기 위한 묘책이다. “비닐을 덮으면 잡초는 훨씬 적어요. 제초에 들이는 노동력이 5분의 1까지도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뿌리가 햇볕을 받지 못해서 힘이 없으니 아무래도 맛이 덜해요. 작물들도 답답하겠지요. 또 멀칭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닐 쓰레기가 4,000평 밭의 경우 무려 1톤이나 됩니다. 정부에서 수거해 재활용한다지만 어마어마한 양이에요. 율무는 어쩔 수 없이 멀칭을 하지만 최대한 자제하려고 합니다.”
2 줄기 끝 솜털이 가득한 수수의 이삭 뭉치는 꽃같이 탐스럽다.
옛날 옛날 옛날 그 차조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토실토실한 강아지 꼬리를 닮은 청차조가 바람 따라 살랑거리니 누구든 그 애교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조는 맛에 따라 차조와 메조가 있고 색에 따라 노랑, 파랑, 은색이 있어요. 청차조는 한방 약재로 쓰일 만큼 귀한 재료로 대접 받았어요.” 말을 마친 임씨가 순식간에 ‘작은 차조’를 낚아챘다. “강아지풀인데 생김이 비슷해서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차조를 비롯해 이 댁의 모든 잡곡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만 먹는다. 작물 스스로의 힘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가물어도 일부러 물을 대는 일은 없다. 해충을 이기는 데도 그렇다. 사람의 간섭을 최소로 해서 작물 자체가 내성을 키우도록 한다. “손으로도 잡고 미생물액을 뿌리기도 하지만 잡곡의 섬유질이 억세서 제 스스로 이겨내기도 합니다. 욕심만 안 부리면 돼요(웃음).”
유기농법, 원시농법, 순환농법
그는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 없이 농사짓는 유기농법에,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옛날 방식 그대로의 원시농법, 밭에서 난 모든 것을 퇴비로 써 밭으로 다시 돌리는 순환농법을 고집한다. 토종 품종의 씨를 뿌리고 직접 씨를 받으니 GMO 걱정일랑 접어두어도 된다. 지독한 원칙주의자로 보이는 그의 농사법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조부 때부터 과수원을 했어요. 막내 삼촌이 파라치온이라는 고독성 농약 중독으로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졸도하는 일이 잦으니 식구가 이런 일을 당하는데 약 치는 농사를 계속 지어야 되나 회의가 들대요.” 친지의 소개로 1990년부터 5년 동안 일본 도자와 친환경 농업 마을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유기농업을 배웠다. 기술과 함께 친환경 농부가 평생 지녀야 할 태도며 마음을 새긴 것이 더 값진 소득이다.
3,4 검정깨의 깍지. 탁 벌어지면 수확해도 된다는 신호다.
깨알 같은 검정깨, 차돌 율무
이제 깨를 보면 올망졸망 매달린 초록색 깍지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몸통에 맵시 좋게 골이 잡힌 원기둥 모양의 깍지를 까보니 까만 깨가 일렬종대로 촘촘히 박혔다. “처음에는 하얀 색이었다가 익을수록 까매집니다. 깍지가 단단하지요? 익으면 알아서 벌어집니다. 제일 꼭대기의 깍지가 탁 벌어지면 수확해도 된다는 신호에요.”
다음은 율무밭. “매일 율무죽 한 공기나 혹은 볶아서 차로 만들어 푹 끓여 먹으면 피부가 맑아진다고 해요. 속병 많은 사람에게도 좋고요.” 율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왜 비싼지를 알았다. 줄기 한 대에 율무 알이 가뭄에 콩 나듯 달렸다. 암팡진 알의 껍질은 차돌같이 단단해(손으로 까보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일반 도정기에 넣으면 기계를 망가뜨려 전국에 몇 안 되는 전용 도정기를 찾아나서야 한다. 제초도 다른 잡곡보다 곱절은 많이 해야 한다. 이런 내막을 지닌 율무는 당연히 잡곡 중 검정깨 다음으로 몸값이 높다.
5 기름진 땅에서 커야 하는 기장. 6 전용 도정기가 필요한 율무. 몸값이 높은 이유가 있다. 7 토실 토실 강아지 꼬리를 닮은 차조.
고라니의 놀이터 기장밭
꽤 오랜 시간을 달렸다. 기장밭은 기름진 땅을 찾고 주변에서 날아드는 농약을 피해 단양 높고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았다. 비포장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느라 멀미가 났다.
“기장은 잡곡의 귀족이라고도 해요. 기장밥이며 기장떡 모두 귀하게 먹던 음식입니다.” 한눈에도 늠름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기장은 가위로 이삭을 잘라 수확한다. 수수, 차조도 그러하다. 잡초가 기승을 부리는 기장 역시 값이 율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밭 한쪽이 움푹 패여 있어 살펴보니 기장들이 누워있다. “바람에 쓰러진 것들인데 누워서도 잘 여물어요.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안 여물면 할 수 없는 거고요.” “약초하는 이들이 내 밭을 무척 탐냅니다. 땅이 깨끗하고 좋거든요.(웃음)” 깨끗한 기장밭에 해가 저물면 고라니가 내려와 놀다 간다.
올가 잡곡 마에스터로 선정된 충북 제천시 송학면의 임영규 생산자.
잡곡에서 유기농이 드문 이유
유기농 잡곡은 비싸다. 무농약 잡곡에 비해 무척 드물기도 하다. 친환경 전문점에서도 ‘품절’을 이유로 잡곡만큼은 국내산을 파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기농 잡곡 값은 인건비랄 수 있어요. 파종부터 제초, 수확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사람이 직접 하니까요. 5,000평 기장밭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일꾼 열다섯이 스무 날을 꼬박 매달려야 하고 이 일을 네댓 번은 해야 합니다. 한 병에 5,000원하는 제초제 한 병이면 몇 백 평에 난 잡초를 쉽게 잡을 수 있어요. 단돈 10만 원이면 해결되는 일인 것이지요. 퇴비 만드는 일도 힘들고 심은 것에 비해 소출이 적은 것도 이유일 겁니다. 애써 생산해놔도 팔 곳이 없다는 것도 고민이죠.”
올가 홍보팀 이지윤 씨가 말을 거든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지면서 잡곡의 매출이 늘어가고 있지만 생각만큼 크게 늘어나진 않았어요. TV 건강이나 의학 프로그램에서 잡곡의 영양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면 다음날 동이 날 정도로 잘 팔리지만 지속적이지는 않아요.” 흰 정제식품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상 대대로 이어온 흰쌀밥을 향한 애정은 쉽게 가시지 않는가 보다.
이제 ‘이 밥’을 먹을 시간
잡곡 투어를 마치고 나니 잘 지은 잡곡밥 생각이 더욱 간절해온다. 이 댁 잡곡으로 밥을 지어 먹는 친구 엄마의 평은 이렇다. “밥맛이 깊어. 구수하지. 옛날 먹던 그 맛이란다.…”
한국사람은 밥 힘으로 산다. 자연의 이치를 제대로 담아낸 밥이라면 그 밥의 힘은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에너지를 발휘하게 해줄 것이다. 특히 온 자연의 색과 영양을 고루 담아낸 밥이라면 더욱! 올해 임영규 마이스트로의 잡곡 작황이 무척이나 좋다니 온갖 잡곡을 골고루 넣어 푸짐히 먹어보리라. 참, 이 댁 잡곡은 대부분 ‘찰’이다. 찰수수, 차조, 찰율무, 찰기장, 찰보리…. “맛이 좋고 밥 해놓으면 부드러워요. 소화도 잘됩니다.” 유독 찰로 재배하는 이유다. 꿀꺽!
글을 쓴 한정혜는 홍보와 관련된 일들을 두루 하고 있다. 간간히 행복한 자원활동에 몰두한다. MBC문화방송의 <W>라는 프로그램을 꼬박꼬박 챙겨보며 집 근처 공원에서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해바라기’하는 것을 즐긴다.
*본 컨텐츠는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에서 발췌하였습니다.
posted by 풀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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