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여름의 맛' 은 어떤 맛인가요?
'여름의 맛' 이란,
여름을 대표하는 맛, 여름을 기억나게 하는 맛,
여름에 가장 먹고 싶은 맛, 여름에 가장 맛있는 맛,
여름이면 생각나는 맛, 등등 일텐데요.
여름이면 때때마다 풍성하게 열리는 각종 과일들의 맛도,
여름의 맛이라고 할 수 있겠죠.
참외, 수박, 포도, 자두, 복숭아, ... @,@
아니면,
땀을 흠뻑 흘리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차가운 생수 한컵의 맛?
꼼꼼히 물을 부어 만들어둔 얼음 몇 알 퐁당퐁당 띄워 마시는 냉커피 한잔의 맛?
오이를 서걱서걱 씹어먹을 때 느껴지는 서늘한 맛도
여름에 가장 반갑지 말입니다.
어떤 이에겐 시원하고, 어떤 이에겐 뜨거운,
여름의 맛.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큰큰그릇>의 '맛있는 에세이'에서 다뤄보았습니다.
그 첫번째 에세이, '방콕의 수박 주스' 함께 보시죠.
여름의 맛
방콕의 수박 주스
비오는 날 부침개가 생각나듯 여름이 오면 늘상 입에 달고 사는 음식이 있다. 땡볕과 더운 바람에 지친 우리의 미각을 깨워줄 뜨겁고 시원한 여름의 맛, 네 가지.
여행이란 것을 오감으로 표현한다면 내게 기억되는 방콕의 감각은 언제나 워터멜론 주스의 시원한 목 넘김, 바로 그거다. 오래 전부터 패션계 사람이라면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양 마치 옆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다. 어쨌거나 그곳의 가장 그리운 것이 고작 워터멜론 주스, 그러니까 우리말로 ‘수박 주스’라고 한다면 혹 실망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마음만 복잡하면 훌쩍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던 것 같다. 뭐가 그리 복잡해 자꾸 떠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대단히 할 말은 없지만, 여하간 틈만 나면 어디론가 떠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그 중, 해마다 꼭 한 번씩 찾아가던 곳은 방콕이었다. 여름, 그것도 초여름만 되면 떠오르는 도시는 그래서 방콕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 듯한 여행의 추억을 끌어내보려 해도 결국은 방콕에서 먹었던 수박 주스의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그 맛만 떠오르니, 역시 내게는 수박 주스가 가장 강력한 ‘여름의 맛’이라 인정하게 된다.
나는 늘 외로웠던 것 같다. 부러 거창하게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건 ‘존재’로서의 외로움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한 가득 안고 떠나온 방콕의 낯선 거리에서 수박 주스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면 온 시름이 날아가는 듯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방콕에 발걸음이 뜸해진 지 오래. 아쉽고 그리운 마음에 서울에서 수박 주스를 찾아봤지만 방콕의 그 맛을 비슷하게라도 낼 수 있는 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방콕의 수박 주스는 내게 어떤 안도감을 주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어떤 연유인지 알 순 없지만, 원래 삶이란 것 자체가 불가해한 것 아닌가.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그리워하고, 삶의 대부분을 일에 쏟아부으며 살고 있지만 그 끝에
어떤 목적을 두어야 할지 결코 찾을 수 없던 혼돈과 질주의 그 때. 물리적으로는 결코 청춘이라 할 수 없는 나이지만 ‘청춘 다음은?’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 없어 애타고 애끓고 불안하고 모호한 그 때. 나 자신도 납득시킬 수 없어 다른 이들에게는 더욱 대답할 말이 없던 그 때. 물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 맛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을 무작정 외면하고 불쑥 비행기에 오르는 일이란 없다. 다만 삶의 무게에 지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잠잠히 생각해볼 뿐이다. 단맛, 짠맛, 매운맛, 시원한 맛… 그것이 뒤섞여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글을 쓴 강정민은 패션&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싱글즈>의 패션 디렉터이다. 사실 패션보다는 잡지, 그리고 잡지보단 매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영화와 패션 필름, 뮤직 비디오 같은 영상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고, 책에 대해 필요 이상의 무한 경외심을 가져 아직 책을 한 권도 못낸 작자이기도 하다.
ㅣ본 컨텐츠는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 여름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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